8세 원수공(元帥公) 휘(諱) 억(薿)은 고려말에 유장으로 강계원수(江界元帥)와 밀직부사(密直府使)를 역임하시다가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개국되니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충성심에 벼슬을 그만두고 순흥땅(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에 거처를 옮기고 이씨조선 태조 이성계의 삼고(三顧)의 청도 뿌리치고 은거하시다가 여생을 마치셨다.
묘소도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젖돌마을)에 있고 사실상 종파의 중시조로 후손들은 종파와 소파로 나뉘어진다.
◈ 8세 휘(諱) 억(疑)
자(字) : 신지(信之)
호(號) : 퇴은(退隱)
종파의 7세 중추원사(中樞院使) 휘(諱) 사성(思誠)의 장남이고 령동정 휘 백향(令同正諱伯鄕)의 손자
출생년월일 : 미상,
묘 :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3리 회석 법곡 자좌 유비석.[회석은 젖돌마을]
시제 : 매년 음력 9월23일(97년부터 음력 10월 3일로 환원 봉사)
배위 ; 정부인(貞夫人) 순흥안씨. 부(父)의 벼슬은 삼사(三司) 좌윤(左尹) 휘(諱) 영부(永孚). 조부는 순흥군(順興君) 휘(諱) 집(輯). 증조부 제학(提學). 휘(諱)는 석(碩) 외조부는 정랑(正郞) 이인수(李仁壽) 예안인이다.
생졸년 : 미상(기일은 음력 7월 15일)
묘 :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이목곡 고자동 갑좌 유비석
(이목곡은 배나무실이다) 시제 = 매년 음 10월 3일
사자(嗣子)는 9세 휘(諱) 만(蔓)과 원길(原吉) 형제가 있으며 사손(嗣孫)에는 10세 휘(諱) 인숙(仁淑)과 효강(孝綱) 종형제가 있다
원수공(元帥公) 휘(諱) 억(薿)은 공민왕조(1352~1374)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성인록(成仁錄) 여러관직을 거친다음 유장을로서 강계원수(江界元帥)에 재임 중 여흥왕 14년(1388) 5월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편성할 때 선생은 우군도통사 이성계에게 예속되어 출정하였다.(高麗史.同節要)
5월 10일은 요동정벌군이 의주와 압록강 가운데 위화도에 도착하자 4일후 14일에 선생은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요동땅에 들어가서 많은 요동군을 참수하고 전리품을 탈취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올리고 돌아오니 여흥왕이 그 용맹이 가상하여 금정아(金頂兒)와 무늬있는 비단을 내려 포상하였다.(高麗史.同節要)
그러나 이성계는 [상국(上國)을 범하면 종사(宗社)와 생민에게 화가이를것이라]고하고 왕명을 반역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여 여흥왕을 폐출시키고 최영장군을 귀양 보낸다음 조선왕조 개국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수많은 충현을 제거하였다.
공은 이후 간성왕(杆城王)4년(1392) 6월 밀직부사(密直府使:정3품)에 올랐는데(高麗史節要) 다음달 7월에 이성계는 마침내 간성왕마저 몰아내고 이조를 개국하여 공을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삼았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거늘 하물며 고려의 신하인 내가 어찌 이씨의 신하가 되겠는가`하며<世譜> 민간으로 돌아가 소백산 아래 순흥땅에 은거 하셨다.<成仁錄>
그 후 이조에서 여러차례 불렀지만 영예와 부귀를 진흙처럼 여기고 고려의 망복지신(罔僕之臣)을 자처하고 그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공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소백산 정상에 올라가 송도를 바라보고 통곡 하면서 선왕을 경배하는 4배를 드렸다고 전하며 이로써 산 정상을 국망봉(國望峰)이라 불리워 오고 있다.
그 고결한 충성과 심덕은 일월보다도 더 밝음이 있으니 실로 도의의 교(敎)에 공이 있다고 하리라.<여말 충의열전 94.12.6발행 432페이지>
공은 불천위(不遷位)로 봉해져 영원히 봉제하고 기일은 음력 2월12일이다.
* 전설에 의하면 태조가 아홉고을 식읍으로 주었으나 `고려의 유신으로 어찌 이씨의 녹을 받으랴`하여 해마다 아홉고을에서 세공이 들어오면 각 고을의 것을 따로 쌓아 크게 아홉더미씩을 이루곤햇는데 그 곡식을 쌓았던데가 지금 단산면 구구리로 조선 말기까지도 순흥 부구고였다.[이상은 영주 영풍향토사 하권 279쪽에서 발췌] 그곡식은 나중에관아에서 빈민 구제용으로 나누어 주었다고한다.
※ 단어해설
의흥친군위동절제사(義興親軍衛同節制使)
(1) 의흥 : 조선초기 군무를 총괄하던 관청.
창건당시 성격을 바꾸어 병조 등과 기능을 교차하였음.<삼군부>
(2) 친군위 : 조선때 오위의 하나인 호위분위에 속했던 함경도 무사 인원40명.
(3) 절제사 : 조선 의흥 친군위에 속했던 군직의 하나.
순문사 : 조선때 절도사에 속했던 거진의 정3품벼슬 본이름은 병마절도사 부윤이 겸임함. 고려때 외직의하나. 34대 공민왕 1년(1388년)에 원수(元帥)로 고친이름. 본명은 병마절제사
◈ 원수공 개갈문
= 해설=
흥주(지금의영주)에서 동쪽으로 십리 회석촌(지금의 단산면 병산3리 젖돌마을) 법곡 자좌원에 높고 번듯한 집같은 묘는 고려 밀직부사를 지내신 이공의 관리지장(의관과 신발을 감추어둔곳 즉 묘소를 말함)이다
묘의표석은 오랜세월에 돌결이 일어나고 풍우에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음으로 후손 여러분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로 비석을 다시 고쳐 세우기로 하고 이에 감히 외람되게 외예지렬에 있는 본인에게 구손(종손) 홍선과 문중 어른네 윤세. 형춘. 창섭 등 여러 사람이와서 비문을 부탁하니 글에 능숙지못한 내가 그 어찌 훌륭한 어른의 비문을 쓸수 있으랴 하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굳이 뿌리치지 못하고 그 책임을 느껴 마침내 그 근본(根本)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억(薿)이요 그 선계는 우계인으로 고려 좌복야공 양식이 조조(시조)요 아들 휘(諱) 순우는 보문각 대제학으로 금성군(錦城君)의 시호 까지 받았으며 대대로 이어온 훈덕이 뚜렷하고 빛나는 가운데도 휘(諱) 구(球)는 18세에 원나라에 들어가 급제하고 예빈경을 지낸분이 공의 증조부요 할아버지 휘(諱) 는 백경(伯卿)으로영동정을 지냈으며 아버지 휘(諱)는 사성(思誠)으로 밀직대부 중추원사를 지냈으며 비위(妣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영양남씨이며 요동지휘사 성노(星老)의 딸이시다. 재기(재주있어쓸모있는 바탕)가 걸특(특별히 뛰어나서)하여 공민왕때 문괴에 올라 우왕14년 강계원수로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와 더불어 요동정벌의 공을 세우고 돌아와 공양왕때 밀직부사로 계셨으며 이성계가 의거로 위화도에서 돌아온후 몇 번이나 권하는 벼슬을 거절한 심정 엄숙하고 난처하기가 말할수 없이 괴로웠으나 대장부로서 떳떳이 갑옷과 투구 칼 그리고 헌면(고관들이 타던 초헌과 머리에 쓰던관)도 토개(쓰레기)같이 버리고 소백산아래 흥주(興州=지금 순흥)에 종적을 감추니 즉 흥주는 공의 처가곳이기에 그 벽지(오지)를 사랑 했을지도 모른다.
강헌왕(이태조)이 즉위(卽位)하고 교지에 `내 장수시절 이억은 부활(부통수)로 있으면서 모든어려움을 피하지아니하고 오로지 무장(武將)으로서 군무만 충실한 그노고를 아껴` 도평의사사사의 벼슬을 주고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런일은 이찍이 어른들에게 들으니 공은 매삭망(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서산의 최고봉에 올라 송경(개성)을 향하여 망배하고 가슴에 품고있는 강개(의분을 느껴슬퍼하고 한탄함)를 토하고 옛임금을 생각하는 충절을 다 하다가 세상을 마치셨다. 그래서 사람들의 산봉우리를 국망봉이라 불러 오고 있다.
공의 풍모와 아름다운 절의는 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러러보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배위(配位) : 순흥안씨로 삼사좌윤을 지낸 영부사의딸로서 아들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만(蔓)은 경력(經歷)벼슬을 지내고 둘째 아들 원길(元吉)은 직장(直長)벼슬을 하였으며 만의 아들 인숙(仁淑)은 군수(郡守)를 역임했으며 딸이 하나 있어 사위는 여흥군(麗興君 민무휼이더라. 원길의 아들은 효강(孝綱)으로 만호(萬戶)를 지내고 인숙의 아들 경창은 주부(主簿) 둘째 경연은 부사정, 셋째 경생은 사정(司正),네째 경화는 사과, 다섯째로 딸이잇어 사위는 유자문으로 부사를 지냈다.
둘째 손자 효강(孝綱)의 아들은 이름이 장(長)이며 생원을 지냈는데 현손(고손)에 이르기까지는 크게 나타나는 이는 수형(秀亨=도촌공)으로 서령(署令 평시서령)을 역임하고 증직으로 이조참판을 받으신 도촌선생이시다.
도촌공 역시 영덕(아름다운덕)의 헌면(고관의통칭)으로 충절의 대를 이었으며 삼 후손 중에도 문리(글하는사람)들이 많아 그 가운데서도 대근(大根)은 현감이요, 양근은 별좌이며 성근은 감역이요,지방은 동돈녕이요,광식은 병참이며 여기(汝機)는 승지 였으며,감(戡)은 대사헌을 지내고 응순(應順)은 의흥군을 여빈은 문과로 전적(典籍)을 지내고 호는 취사였으며 찬(纘)은 직장(直長)을 복남은 병사(兵使)로 증직병조판서를 받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더라.
명남(命男)은 문과로 참판을 휘도(徽道)는 문과로 직장(直長)을 경항(慶恒)은 문과로 예참(禮參)을 경익(慶益)은 문과로 교리(校理)를 서우(瑞雨)는 이조참판과 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송곡(松谷)이였다. 그 외에도 사적(벼슬명부)에 오른자가 많자만 다 기록치 못하노라.
비록 벼슬이 없는 사람도 다 문학을 하고 의로운일을 하는이가 많아 나라 안에서 두루 번창하더라. 슬프다 공은 오랫동안 불천위로 묘식(죽어서 종묘 또는 사당에서 제사를 받음)을 잡수시고 계시니 그 이름이 빛나는 일인데 이 어찌 어진이의 후손으로서 그 감회가 무궁함을 억누르면서 유학자(儒學者)로서 불행이라 할 것인가?
이태조가 비록 벼슬을 주었지만 공은 받지않기를 고수하고 의로움을 숨길수 있느냐 하시면서 충신의 길을 따르셨다. 공의 유지로 보아 갈면(비석전면)에는 당연히 고려조의 직함이 쓰여져야 하는데 구각(옛비석)에는 없으니 한스러우나 이미 새겨진 잠저(아직 왕위에 오르기전에 살던집)시절의 이성계를 도운공이 있어 즉위 후에도 은총이 넘쳤으니 그때의 나라사정이 바뀌어 그렇게 썼다고 보고 공이 속세에 초연한 모습으로 은거하시는 거룩한 절개는 영원토록 저 서산의 높은 봉우리와 같이 숭앙(崇仰)하고 공의 그 이름도 함께 빛남은 구고(으슥한 깊은 연못)의 맑은 물이 공의 마음과 같이 맑으니 법곡원(=묘지)의 울창한 송회(=솔과전나무)도 고려조 이대부의 봉수(=무덤앞의 묘표로 심은나무)이니 초자목수(=땔나무꾼과 목동)들은 주위의 나무를 베지말고 삼가조심하여 다닐지어다.
단기 4314년(서기1981년) 신유 5월 일
외예손(外裔孫 : 외가의 대수(代數)가수 (먼 자손) : 김 설 글모음
후 손 : 일희(一熙) 삼가씀
1998. 6. 20 (19대손) 사무국장 제춘(制春)해설